템플 키친 보리밥, 김치, 두부로 완성된 고려 승려 식단
고려 시대 승려들이 보리밥, 수제 김치, 신선한 두부로 어떻게 몸과 마음을 다스렸는지
절제, 계절감, 수행의 철학이 담긴 사찰 음식의 기원을 살펴봅니다.
서론
고려 시대(918~1392)의 사찰은 단순히 불교 수행 공간을 넘어, 조선 이전 한국 채식 문화의 중심지였습니다. 승려들은 매일의 식사를 통해 마음을 비우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영양을 보완하는 법을 익혔습니다. 특히 보리밥, 김치, 두부는 사찰 밥상의 핵심 요소였고, 이 세 가지는 수행과 건강, 명상과 연결된 중요한 음식이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고려 시대 사찰에서 어떻게 이 세 가지 식재료가 음식 철학을 형성했는지를 자세히 들여다보며,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사찰 음식의 뿌리를 추적해 봅니다.
1. 보리밥: 한 알의 곡식이 주는 심신의 에너지
고려 승려들이 자주 먹던 보리밥(보리+쌀 혼합밥)은 단순한 탄수화물 공급원을 넘어 수행자의 식단 원칙을 담고 있었습니다. 보리는 쌀보다 식이섬유가 풍부하고 포만감을 오래 유지시켜 주며, 위장을 따뜻하게 해줍니다.
주로 새벽공양 때는 보리밥과 간단한 국, 나물 반찬으로 하루를 시작했으며, 무거운 요리 없이도 충분한 에너지를 공급해주었습니다. 보리밥은 소박하지만 깊은 맛이 있으며, 절제와 검소함, 정신 수양이라는 불교 철학과도 깊은 연관이 있었습니다.
2. 수제 김치: 발효와 수행이 만나는 접점
고려 시대의 김치는 오늘날과 같은 매운맛보다는 소금, 마늘, 생강, 약간의 산초나 들기름 등 자연에서 얻은 재료들로 숙성시킨 순한 맛의 발효식품이었습니다. 승려들은 냉장고가 없던 시절에도 저장 발효 기술을 통해 각 계절에 맞는 채소를 오래 보관하며 섭취했으며, 김치는 단순한 반찬이 아닌 '약과 같은 음식'으로 여겨졌습니다.
절집마다 김치 맛이 달랐고, 이는 수행의 철학과 지역 재료, 계절 풍토에 따라 달라졌습니다. 일부 김치는 소화 촉진, 일부는 열을 내려주는 용도로 만들어졌으며, 김치를 담그는 공정 자체도 마음을 비우는 수행으로 여겨졌습니다.
3. 두부: 담백하지만 깊은 단백질의 지혜
사찰 식단에서 빠질 수 없는 또 하나는 두부였습니다. 콩을 불려 갈아 만든 콩물을 끓이고, 천연 응고제를 사용해 응고시킨 후, 천으로 감싸 눌러 수분을 제거해 만든 수제 두부는 맛과 영양에서 완성도가 높았습니다.
두부는 단백질이 풍부하고 소화가 잘되어 수행자들이 육체적 피로를 줄이며 마음을 고요하게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주로 생두부 형태로 고추냉이나 약초장을 곁들여 먹거나, 묽은 된장국에 넣어 부드럽게 끓여 먹었습니다. 그 담백함은 수행자의 내면처럼 단정했습니다.
4. 공양의식과 마음챙김 식사
고려 사찰의 공양은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의식이었습니다. 승려들은 항상 조용히 앉아 식사 전 감사의
기도를 올리고, 정해진 양만큼만 먹고, 남기지 않도록 했습니다. 음식을 먹는 동안 말하지 않으며, 숟가락질과 젓가락질 하나하나에도 집중했습니다.
이러한 식습관은 '음식도 수행'이라는 철학 아래 이루어졌으며, 모든 음식은 수행의 일부, 마음챙김의 실천이었습니다. 공양은 몸만이 아니라 마음까지 채우는 시간이었습니다.
5. 계절에 따른 식단과 사찰 텃밭
사찰에는 대개 작은 텃밭이 있었고, 여기서 자란 보리, 배추, 콩, 들깨, 미나리, 고사리 등이 식단의 주재료가 되었습니다. 봄에는 산나물, 여름에는 된장국과 두부, 가을에는 갓김치와 무말랭이, 겨울에는 묵은지와 말린 나물 등으로 계절의 흐름을 반영했습니다.
사계절의 흐름을 자연 그대로 받아들이며, 불교의 무상(無常) 사상과 생명의 순환을 음식을 통해 경험했습니다.
6. 사찰 음식의 외부 전파와 영향
고려 말기에는 사찰 음식이 왕실이나 양반가로 전파되기 시작했습니다. 보리밥은 건강식으로 알려졌고, 두부는 귀한 손님에게 대접되는 음식이 되었으며, 김치는 민간에서도 점차 발효식품으로 자리잡기 시작했습니다.
사찰 음식은 검소하지만 영양가 높고, 조리법이 간결하면서도 균형 잡힌 식사 형태를 유지하며, 한국 요리 문화 전반에 뿌리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7. 현대에서의 계승과 재해석
오늘날 해인사, 통도사, 송광사 등에서는 전통 사찰 식단을 경험할 수 있는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이 운영되며, 도시 속 채식 레스토랑에서는 고려식 사찰 밥상을 재해석한 메뉴들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보리밥 정식, 순한 백김치, 수제 생두부, 나물 반찬은 건강식으로 각광받고 있으며, 현대인의 몸과 마음을 안정시키는 ‘마음 밥상’으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조용히 먹기’, ‘음식에 집중하기’ 등 사찰의 식사 예절은 웰빙, 명상, 채식 열풍과 만나 세계적인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결론
고려 시대 승려들의 사찰 밥상은 단순히 ‘먹기 위한 식사’가 아니라, 철학과 명상이 깃든 한 끼였습니다. 보리밥의 소박함, 김치의 발효 지혜, 두부의 영양 가치는 오늘날에도 유효하며, 사찰 음식은 전통과 현대를 잇는 가교가 되고 있습니다. 몸과 마음을 함께 다스리는 그들의 음식 문화는 우리가 바쁜 일상 속에서 잊고 있던 ‘음식의 본질’을 되새기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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